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안함 피격 사건 (문단 편집) === 실종자 수색 및 영결식 === 104명의 승무원 중 58명이 당일 구조되었으나 46명은 그날 구조되지 못했고 떠내려온 시신도 보이지 않았다. 3월 30일에는 실종자들을 끝까지 구하려다 무리한 잠수를 했던 해군 UDT/SEAL 소속 [[한주호]] [[준위]][* 한주호 준위는 청해부대 소속으로 [[소말리아]] 해적 퇴치까지 다녀온 베테랑이었으며 정년이 끝나서 전역까지 겨우 '''2년'''을 남긴 상태였던지라 주위를 더 안타깝게 하였다.]가 결국 [[잠수병]]으로 [[사망]]하고 말았다. 이에 관해 충무무공 [[대한민국 훈장]]이 추서되었다. 한주호 준위에 대해 훈장 수여 외에 [[소위]]로 1계급 특진 제안이 왔는데 여론이 이를 두고 무지한 처사라고 비난한 바 있다. 계급은 분명 소위가 높고 법적으로 같은 위관급 장교의 대우를 받으나, 준사관은 부사관이 신분전환하여 올라가는 자리인 만큼 "부사관의 별"과 같은 위치에 있는 계급이라 소위보다 그 무게가 훨씬 크기 때문. 다만, 전사 및 순직자에 대한 특진에 의한 진급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절차적으로 물어보는 것 자체는 맞는다. 이 제안은 유가족들이 사양하여 일단락되었다. 그리고 그의 희생정신과 위국헌신 정신은 이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. 한주호 준위의 사망장소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천안함 함수에서 작업 중 사망한 것이라는 정부 발표의 구체적 자료나 증언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. 해도, 국방부 백서, 함수 구조 책임자였던 권영대 UDT대대장의 증언이 다 달랐던 것이다. 이에 따라 정확한 사고지점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었다.[[http://www.mediatoday.co.kr/?mod=news&act=articleView&idxno=136952|링크]] KBS가 보도했던 제3의 부표지점 설에 대해서도 정확한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. 4월 3일, 실종자 46명 중 한 명인 남기훈 상사의 시신이 함미에서 발견되었으며 같은 날 천안함 수색을 돕고 있던 민간[[어선]] 금양호가 수색을 마치고 조업지로 되돌아가던 중 인근 해역을 지나던 상선과 충돌하여 침몰, 9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났다. 또한 구조기간 중 4월 15일과 17일, 초계임무로 출격한 해군의 링스 헬기가 각각 전남 진도와 서해 소청도 부근에 한 대씩 추락하여 총 3명이 사망[* 전원 15일 추락 기체로, 조종사 두 명의 시신은 수습했으나 조작사 1명은 찾지 못했다. 17일에 추락한 기체는 조종사 및 조작사 총원이 구조됐고 기체도 회수했다.]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. 이후 나머지 실종자 44명 중 4월 15일 인양된 천안함의 함미에서 [[http://www.ytn.co.kr/_ln/0101_201004160106098100|36명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]]. 인양 과정은 TV를 통해 전국에 보도되었다. 침몰 29일째인 4월 24일에는 함수가 인양되었으며, 추가로 1명의 시신이 [[http://www.ytn.co.kr/_ln/0101_201004241241416252|발견되었고]] 연돌에서도 1명이 발견되었다. 4월 29일, 평택 2함대사령부와 대전 현충원에서 천안함 희생 장병 46명의 영결식이 엄수되었다. 사망자와 실종자는 모두 1계급 특진과 [[대한민국 훈장#s-4.4|화랑무공훈장]]이 수여되었다. 시신을 찾지 못한 산화한 용사 6명은 유품을 태워 안장되었다. 해군에서는 전사자들에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해군장으로 장례식을 치렀으며 당시 항구에 정박하던 수많은 함정 승조원들은 대함경례로 최고의 예의를 갖춰서 고인들을 보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